인간을 위한 디자인의 필요성

2020.10.09

빅터 파파넥의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읽었다. 서문을 열며 눈에 들어온 “영구적인 쓰레기를 창조하는 기술이 정성스레 젊은이들에게도 전수되고 있다”[1]는 말이 상당히 단호하게 느껴졌고, 또 그렇기에 재미있었다.

현대 사회에서의 인적/물적 자원과 기술들-디자인을 포함한-이 집약된 산업 중 하나로, 휴대폰 분야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외피에서 시작해 하드웨어/소프트웨어는 물론, 웹/앱의 도입에 맞추어 복잡해진 UI/UX 디자인과 그에 따르는 그래픽디자인 등. ‘연락을 취한다’는 당초의 역할을 되짚어보면, 현재의 휴대폰은 원점에서 크게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빅터 파파넥’의, 쓰레기를 창조한다는 시선에서, 나는 새로이 출시되는 휴대폰 제품이 이전과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제품을 광고하는 어마어마한 마케팅 매체와 비교했을 때, 앞서 언급한 기술과 디자인 면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별로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2019)에 나온 아이폰의 경우는 카메라가 세 개 달린 모습이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천진반’이라는 캐릭터를 떠올리게 해서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한편으로 휴대폰은 ‘존 마에다’가 ‘단순함의 법칙’에서 이야기한 ‘복잡한 것을 숨기고 축소하는’[2] 전략과 기술이 훌륭하게 반영된,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디자인의 사례이기도 하다. 휴대폰이 사람들의 다양한 니즈를 구현하며 생활에 미치는 편리함은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인간을 위한 디자인’ 기술이 외려 인간에게 해가 되는 지점들도 분명히 있다. 파파넥의 시각을 견지해보자면, 우선 휴대폰의 대량 생산에 의한 환경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건강 면에서의 시력 문제, 휴대폰 중독 문제, 어플리케이션이 초래하는 사회적 이슈도 예로 들 수 있다. 이렇듯 제품이 갖는 입체적인 성격을 고려했을 때, 인간을 위한 디자인에서의 ‘인간을 위함’은 어느 정도의 범위를 생각해야 할까.

만약 본인이 이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 디자이너라면 어떠한 활동을 할 수 있을까. 파파넥의 9센트 깡통 라디오처럼, 본래의 기능과 목적에 충실한 휴대폰을 디자인하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있을까.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것. 방향은 다르겠지만, 어쩐지 무인양품의 철학이 떠오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무인양품 매장이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메시지와는 약간 상충되면서도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마찬가지로 현 시점에서 문자/전화만 가능한 휴대폰을 디자인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시도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품이 초래할 폐해를 고려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디자이너가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라고 단언해 매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한편으로는 본인이 생각하는 ‘인간을 위한’ 어떠한 디자인적 메시지를 설파하고 싶을 때, 명성과 메시지의 힘이 비례하는 일종의 공식을 벗어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본인의 가치관에 반대되는 요구를 받을 때,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얼마나 있을까.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이 높아진 이후에야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면, 그 이전까지는 메시지의 표출을 참아야 한다면.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하기 위해, 인간을 위하지 않는 디자인의 기술을 연마한다면. 어쩐지 웃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과 고집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명성을 얻은 이후에도 어려울 이야기일지 모른다.

“디자인의 ‘순수성’이라는 개념과 디자이너의 도덕적 중립성은 디자이너가 공식적인 지위에 올랐을 때나, 월급을 받고 일할 때나, 혹은 프리랜서로 일할 때 항상 나타난다. 그것은 디자이너의 독자성을 확고히 하고 경영자 그룹에 의한 직무상의 침해로부터 디자이너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행히도 동시에 그것은 자기기만이며, 감쪽같이 대중을 속이려 드는 속임수이다.”[3]

파파넥의 말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명성에 상관없이 메시지를 디자인에 담을 기회는 디자이너 본인에게 달린 것 같다. 때문에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을 위한 디자인’은 의미 없는 고민일 것이다. 기질의 문제이며, 선택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도 맞는 이야기이다. ‘내가’, 그리고 ‘만약’ 변화를 원할 때에 비로소 시작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명성있는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디자인을 정의한다. 다만 사회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나는 “모든 사람은 디자이너”[4]라는 파파넥의 주장에 동의한다. 현재는 캔 라디오가 필요했던 1960년대도 아닐 뿐더러, 내가 사는 곳은 인도네시아의 발리도 아니다. 하지만 유사한 상황들은 여전히 도처에 존재하며 새로이 등장한 문제들도 있다. 파파넥이 교육 문제를 다루며 이야기한 “생물학적 종의 분화가 멸종으로 이어진다”[5]는 말을 폭 넓게 적용해보면, 이러한 상황들을 무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인간에게 좋지는 않을 것 같다. 휴대폰을 디자인하며 캔 라디오로 회귀하지는 않을지언정, 캔 라디오의 정신을 상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월간 디자인의 2010년 5월호는 당시의 아이티 대지진 이슈로 인해 ‘기아, 가난, 재난에 디자인은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라는 특집으로 구성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와 동양미래대학교의 졸업전시 작업이 함께 소개되기도 했는데(물 부족, 아동인권 문제를 다룬 광고 디자인), 담당 에디터의 말이 인상 깊었다. “졸업 후 사회로 진출할 예비 디자이너들이 인류 문제를 잠시나마 경험해본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다. 서로가 비슷한 경험을 하며 성장하는 한국 디자이너들에게는 이 같은 작은 경험도 큰 자산이 될 것이다."[6]



[1] 빅터 파파넥: 『인간을 위한 디자인』, 현용순 옮김, 미진사, 2009, 9-10쪽
[2] “스타일과 유행이 휴대폰 시장에서 강력한 구매 동기로 작용하게 되면서, 휴대폰 제조업체들은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에 고객들이 원하는 복잡한 기능을 모두 집어넣어야 했다.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요구의 균형을 이루는데 전념하게 된 것이다. (...) 혁신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복잡성을 숨기는 영리한 방식들이 있는 제품에 대해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시장이 그러한 진화를 계속 추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존 마에다: 『단순함의 법칙』, 현호형 옮김, 유엑스 리뷰, 2016, 40-50쪽

[3] 빅터 파파넥: 『인간을 위한 디자인』, 현용순 옮김, 미진사, 2009, 146-147쪽
[4] 같은 책, 27쪽
[5] 같은 책, 368쪽
[6] 이애지, 『예비 디자이너들의 사회 참여』, 월간 디자인, 2010;2010(383), 129쪽